『명상적 걷기』는 옛사람들이 기(氣)나 도(道)로 설명하였던 개념을, 관념적 설명을 지양하고 오로지 바른 몸만들기와 바르게 몸 움직이는 원리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새롭게 규명한 책이다.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주로 사용하는 팔과 다리의 힘에 감추어진 힘, 즉 통합된 힘에 주목하여, '몸을 통해 깨달은 무위자연'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저자는 코어를 써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일상적인 동작들은 모두 명상적 움직임으로 바뀐다고 주장한다. 본문은 ‘몸 나를 자각하고,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의 명상적 걷기의 두 단계를 제시한다. 바른 몸만들기를 통해 감동(感動)이 담긴 운동(運動)의 원리를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다.
책속으로
머리말
'몸 힘'은 운동에 별 재능이 없는 내가 세계적인 운동선수, 무용가들의 몸짓을 바라보며
'왜 나는 저들과 다른가?' 궁금해 하고 좌절하고 고민하다 마침내 도달한 결론이었다.
이 힘은 일상생활에서 주로 사용하는 팔 힘(또는 다리 힘)과는 달리 감추어진 힘, 통합된 힘이다.
누구나 몸 힘을 갖고 있으나 잘 쓰지 못하는 건 팔 힘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팔 힘을 버리면 몸 힘은 저절로 드러난다.
꽤 오랜 세월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하던 중 어느 날 문득
'그것'의 실체에 처음 다가갔던 그 때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드문 체험 중 하나였다.
이후 그때까지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도통 몰랐던 책들을 다시 써내 읽어 보니
신기하게도 의문투성이였던 내용들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옳은 설명과 옳지 않는 설명을 꽤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찾은 이 길이 바른 길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재능이 없는 탓에 이 간단한 걸 깨닫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허송세월했다고 여겼는데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난 이는 자기 자신은 몸 힘을 쓸 줄 알지만
단지 감각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이미 몸이 완성된 사람은 출발선에 선 즉시 달려갈 수 있는 반면
나는 달리고 싶어도 출발선에 서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얻은 귀중한 경험이 많았다.
재능이 뛰어나 준비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을
과연 축복이라고만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타고난 재능이 없는 덕분에 나는 비교적 합리적으로 몸 힘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 같다.
대다수 사람들은 뇌가 직접 팔(또는 다리)에 명령을 내려 움직이는 것을 당연하다 여긴다.
그러나 뇌가 직접 팔을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된다.
뇌가 팔에 직접 명령을 내리면 팔 힘이 나온다.
뇌는 오로지 움직임의 근본이 되는, 몸 안의 한 점인 '그것', 즉 코어(core, 核)와 소통하고
코어가 팔을 움직이게 할 수 있어야 몸 힘이 나온다.
나아가 뇌가 코어에 명령을 내린다는 행위마저 잊어버릴 수 있게 되면 몸은 최대의 몸 힘을 낸다.
이 때 몸은 오로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따를 뿐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몸 힘을 쓰기 위해 팔 힘 버리기가 쉽지 않다.
이걸 버린다는 건 그 동안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것에
오류가 있음을 자각하고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발상의 전환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뒤집어엎을 만큼 확신을 갖게 되기 전까지 함부로 팔 힘을 버릴 수는 없다.
뇌가 코어에 명령을 내리는 것은 운(運),
코어가 팔(또는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동(動)에 해당한다.
모든 몸 움직임은 항상 운(運)하고 동(動)해야 한다.
운(運)없이 동(動)하는 건 바른 움직임이 아니다.
이것이 바른 몸 움직임의 진실이고 진리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이것이 나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고
이미 앞서 가신 분들의 한결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다를 뿐 핵심은 모두 같은 것이다.
운동(運動)을 알면
감동(感動)이 온다.
운동의 동(動)은 몸이 움직인 것이고
감동의 동(動)은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같은 동(動)이지만 의미가 다르고, 의미는 다르지만 근본은 같다.
이렇듯 몸과 마음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깊은 곳으로부터 느낌이 있어야 마음이 움직이듯
마음으로 움직임의 근본이 되는 '그것', 즉 코어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몸은 비로소 바르게 움직인다.
스스로 운(運)하고 동(動)한다고 여겼다가
더 깊은 곳에서 운(運)하는 법을 발견하면
마음은 또 다시 감(感)하고 동(動)한다.
운동(運動)의 원리를 알기 위해 바른 몸만들기를 해야 한다.
속근육(inner muscle) 기르는 연습을 체(體)라 하고
바르게 몸 움직이는 연습을 통해 코어를 자각하는 것을 용(用)이라 한다.
역으로 코어를 자각하는 만큼 속근육이 단련된다.
단련이란 체(體)와 용(用)이 끊임없이 서로를 자극하는 관계이다.
체(體)를 통해 용(用)을 알고
용(用)이 깊어질수록 무위(無爲)에 접근한다.
몸과 정신은 분리될 수 없으므로 몸에 쌓인 쿵푸(工夫)는 반드시 정신의 덕(德)이 된다.
나아가 새로운 관점에서 인문학적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이 책은 앞서 나온 '그 남자의 몸만들기'와 여러 가지 의미로 연결되어 있다.
앞 책이 몸 힘 중 큰 힘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몸 힘 중 섬세한 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앞 책이 몸 힘에 관한 주제를 제시하였다면
이 책은 몸 힘에 관한 변주와 같다.
아무튼 둘 다 몸 힘에 관한 책이다
출판사서평
"운동(運動)을 알면 감동(感動)이 보인다"
이 책에서는 옛 사람들이 기(氣)나 도(道)로 설명하였던 것을, 그 용어를 거의 쓰지 않고 오로지 바른 몸만들기와 바르게 몸 움직이는 원리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새롭게 규명하였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몸을 통해 깨달은 무위자연'이다.
무위자연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몸 힘’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 힘은 일상생활에서 주로 사용하는 팔 힘(또는 다리 힘)과는 달리 감추어진 힘, 통합된 힘이다. 누구나 몸 힘을 갖고 있으나 잘 쓰지 못하는 건 팔 힘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팔 힘을 버리면 몸 힘은 저절로 드러난다. 팔 힘은 뇌가 팔에 직접 명령을 내림으로써 매우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다. 반면 몸 힘은 몸 안의 한 점인 ‘그것’, 즉 무게 중심과 통신하는 법을 알아야 나온다. 지구 안에 핵(核)이 있듯이 몸 안에도 코어가 존재하는데, 몸 힘이 나오는 근본인 무게 중심이 코어다. 몸 힘의 뿌리가 되는 이것이야말로 ‘몸 나’인 것이다.
몸 힘은 다시 ‘큰 힘’과 ‘섬세한 힘’으로 나눌 수 있다. 큰 힘은 역도 선수가 역기를 들어 올릴 때, 무술에서 일격필살로 단 번에 상대를 제압할 때 쓰는 힘으로서 팔 또는 다리 힘과 비교되는 압도적으로 힘이다. 섬세한 힘은 주로 춤이나 서예와 같은 예술적 행위에 쓰인다. 무용가의 사소한 동작조차 보통 사람들과 어딘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섬세한 몸 힘을 사용하여 몸을 제어하기 때문이다. 전혀 다르게 보이는 두 힘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진짜 몸 공부가 시작된다.
코어를 써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일상적인 동작들은 모두 명상적 움직임으로 바뀐다. 나아가 움직이는 가운데 마음으로 코어를 관찰하는 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평소보다 천천히 움직이면 무게 중심이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순간을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명상적 움직임은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코어를 쓰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단지 흉내 내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개념을 분명하게 적용시킨 것이 ‘명상적 걷기'다.
명상적 걷기의 첫 단계는 코어, 즉 ‘몸 나’를 자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몸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가 있다고 믿었던 코어가 사실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코어를 자각한 후에만 코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즉 빈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머리로 상상하여 아는 무위자연은 ‘하지 않음’과 ‘할 필요 없음’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몸을 통해 깨달은 무위자연은 이것을 명백하게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른 움직임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불필요한 건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새삼 인식하여 그런 요소들을 점차로 제거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몸을 통해 깨달은 무위자연'의 개념이다.